15.1.30. 유성도서관에서 대여해서 봄.. 이 책은 사야해 ㅠㅠ
간만에 대작을 읽었다.
정말인문학적 관점에서 잘 쓰여진 대중서(이게 대중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가 어떤 것인지 한껏 느꼈다.
사회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것이 가진 근본 문제점이 무엇이며 현상의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다양한 예시와 다른 사상가의 견해를 곁들여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말하기가 헛됨이 되버린 사회, 경청이 사라지고 모두가 자기의 말 만을 하는 사회
스토리와 서사가 사라져 개인의 경험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오로지 성과와 결과로만 인정받는 사회
그래서 나와 너의 다름이 아니라 나와 남의 분리만이 남게 되고
차이와 다름을 통한 경험과 여정으로 개인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분절되고 나눠저 동질한 집단 속에서만 살아가게 되는 사회
(이게 사회라고 불릴 수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그것을 관통하는 말 "단속" .. 말이 의미가 없어져 버린 우리네 자화상
이 책만큼은 몇몇 구절을 다시 복기하고 싶다.
고독의 부재에서 고통받아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고독, 즉 쉼이다 --- 자유의 최고봉은 무엇을 할 자유가 아니라 '함'으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자유다. 이 쉼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유의 내면을 만들 수 있다.
한 사회가 '사회'일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관계의 단절은 개인의 경험을 배제하면서 추상적으로 실존화 하여 이야기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다양한 경험으로 부터 도출될 때에 구체적 보편성을 갖는다
지금의 냉소와 절망은 아무것도 이행되지 않는 사회가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결과일 수 있다. 말에 대해 냉소하고 말문을 닫아버릴수록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이슈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읽어버린다. ---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실존적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관계의 부재다.
우리의 삶이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편처럼 끊어져 있으며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공허해하고 무의미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삶이 연속적일 때 비로소 개인과 사회의 서사가 완성되고 이 서사를 갖춰야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그 연속성이 끊어진 것이다.
첫번째 단속은 낯선것.타자와의 만남의 단절이다. 두번째는 공적인 것과의 단속이다.세번째 자기검열 혹은 스스로를 단속하는 경향으로서의 단속이다. 네번째, 이런 결과로 나타나는 연속의 반대로서의 단속이다.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 이런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위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는다.
이렇게 타자와의 만남이 사라지고 개별화 동질화된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은 축소되고 국지화된다. 경험은 낯선 것과는 단절된 채 동질적인 것 안에서만 무한 반복된다. ---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인간관계는 더이상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통과 상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나아가 구경거리로 소비한다. --- 즉 우리사회는 말이 억압된 공간이라기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는 끊임없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과잉연ㄱㄹ되어 쉴 새 없이 상처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공간이 되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사회에는 이미 정해진 길이 있다. 성취와 발달이라는 이름의 이정표다. 이 발달의 이정표를 따르지 못하면 낙오자 실패자가 된다. --- 성취감은 더 이상 내안에서 우러나는 느낌이 아니라 지표에 의해 주어진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입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은 낯섦으로부터 설렘은 없애고 두려움과 피곤함만 남겼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고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환대가 아니라 예의바름이 된다.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인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외로워졌다. ---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아와 세계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실감과 체험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보증할 방법이 없다. 이 상태가 되면 인간에게는 세계도 타자도 필요 없어지게 된다.
전통적인 주부의 가사노동인 청소나 요리 등이 파출부에게 맡겨지고 좀더 전문적인 자녀교육지원과 재산증식에 몰두한다. --- 주부는 이제 두갈래로, 즉 가사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신자유주의화한 전업주부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일제로 일하며 가사노동까지 떠맡는 여성노동자로 나뉠 뿐이다. 전통적인 친밀성의 노동은 아웃소싱되었고 주부는 친밀성의 기획자이자 매니저가 되었다.
기획된 친밀성 아래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는 타자성보다는 동질성을 강조한다. ---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부모가 정해준다. 부모는 자신이 제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의 미래도 기획관리한다. 자식과 자신을 완전하게 동일시하는 것이다. --- 기획된 친밀성은 자식에 대한 과도한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동일시에서 비롯된다.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착각하게 된다. --- 아이가 부모의 기회 아래 있지 않은 다른 남을 만나면서 남으로 자라날 기회와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이중성을 띠고, 역설적으로 친밀성 혹은 관계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이 아버지의 기획된 친밀성이 아이에게서 성장의 계기를 박탈한다는 점이다. --- 아이가 낯선 세상과 만날 기회를 제거했다.
가족과 부딪히고 간섭받을 수밖에 없는 집을 나오는 순간 우리가 만난게 되는 것은 매우 낯선 형태의 방이다. 바로 집없는 방이 그것이다. --- 내 방의 사생활은 방을 둘러싼 집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매개없이 곧바로 타인의 방과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한국의 근대는 돌고 돌아 결국 달동네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달동네와는 다른, 교류조차 없는 거대하고 텅 빈 박스로 돌아왔다. 이 아파트는 관계는 없되 사생활은 알 수 있는 곳, 그리하여 그 어느곳보다 더 이웃을 경계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모르도록 더 꼭꼭 단속해야 하는 곳이다.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혹 나에게 어떤 해르 ㄹ끼칠지 몰라 늘 경계하며 촉을 세우고 있다. 소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사생활을 압도했다. 자산가치가 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이것이 한국의 근대다.
사람이 내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세계와 불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순응을 통해서는 내가 나일수 없으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 세계와의 불화가 언어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세계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혹은 상대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비로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된다.
자유는 시장자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할 때 그는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그 욕망이 자신에 의해 점검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보였던 많은 것조차도 사실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강요였다. 진정한 자유는 그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에서 나온다. --- 세상으로부터 물러나고 고독한 상태가 되는 것에서 비로소 자유는 시작된다.
함이 지나칠수록 인간에겐 생각할 틈이 줄어든다. 생각할 공간, 즉 내면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이 과잉된 인간에게 내면의 풍요, 즉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함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만족이 삶의 목적이 된 존재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소비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삶에 질문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 함으로 가득찬 전형적인 시공간이 바로 현대사회의 여행이다. 여행의 본연이 의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 반면 현대사회의 여행의 함은 발견의 함이 아니라 찍고 도는 확인의 함으로 바뀌었다. --- 봤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을 압도한다.
세계란 관계 내에서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인데 유령들은 그들이 들어갈 사이-안에 있음에도 그 누구도 그것을 사이라고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은 고독한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으며 외롭다.
이처럼 세상이란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인간은 남의 생명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일말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야차가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다.백성의 한쪽은 먹이로, 다른 한쪽은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위험과 안전으로 양극화하여 통치하는 국가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말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요구로 치환되었다. --- 이로써 시스템 안과 밖의 소통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한편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말할 권리를 가졌음에도 언제 어디서나 그 말이 무시당할 수 있다는 점을 체득해왔다. 권력을 못가진 사람은 공론장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그 공론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 사정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바로 소비자본주의의 급격한 성장이다.
한국적 근대의 비극은 정작 다른 데 있다. 바로 말이 곧 폭력이라는 이 포스트모던한 깨달음을 우리가 소통을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알아버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에 강박적으로 집착할수록 말에 대해 냉소한다. 그러면서도 말을 해달라는 요구가 얼마나 큰 권력인지 또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자해적으로 말을 활용한다. 그러나 이때 힘없는 소비자임을 강조하면서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만을 바라봐줄 것을 요구할 때 결국 칼 끝이 향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말 그자체일 것이다.
학굥서는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것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을 징벌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노동이 징벌과 교육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학교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은 노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노동자가 된다. --- 한국의 학교는 노동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충실한 훈육기관이기도 하다 .--- 어떤 몸인가 바로 지루함을 견디는 몸이다.
68혁명 이후 서구에서는 들뢰즈가 통제사회라고 부르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 사회는 자유의 박탈이라는 감금을 통해 움지깅는 사회가 아니다. 이 사회는 사회 전체를 감옥으로, 학교로, 병원으로 개방한다. 감금하여 조샇고 훈련하던 그 판옵티콘의 시선이 도처에 자리한다. 이 통제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기 관리문제로 전환된다. 이 자기관리에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게 남는 것은 영원한 탈락이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만든 것이 경쟁의 내부화다.
노동에서 발생하는 비용이나 문제의 부담은 이처럼 아래의 노동자가 지고 이익은 위의 자본이 가져가는 것, 이것이 유흥주점식 경제모델이다.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은 개인이며 --- 결국 직접 연계된 관계는 폭력적으로 격렬하게 부딪히며 서로를 쥐어짜내지만 한 고리만 건너뛰면 서로 책임질 것 없는 사이가 된다. --- 그렇기에 이 유흥주점형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나아가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는 능력이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이미 한번 탈락하면 재기가 불가능한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로 전환했다.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잉여인간을 생산하고 관리한다. 특히 노동의 기계화, 전자화에 맞물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은 잉여인간을 영원히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생산과 소비의 영역 모두에서 경제적으로 아무런 효용가치를 갖지 못한다. 모두가 자신이 잉여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에 대한 댓가로 해고된 노동자가 느낄 추방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하고 뒤를 돌아봐야 한다. 점검하는 삶은 멈추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점검하는 삶에서 뭄춘다는 것은 곧 주저함을 의미한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배려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의 의견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점검하는 삶은 자신의 확신을 괄호로 묶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삶이다. 배움에 주저함이 없는 삶, 배움을 위해 타자와의 만남에 주저함이 없는 삶이 바로 이 점검하는 삶이다.
초조함은 이런 점검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초조함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체제에 의해 체계적으로 생산,관리되는 통치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대신 이미 설정된 목표와 방향 내에서 제대로 과업이 수행되는지 아닌지를 감시 관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 개인이 이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 된다. --- 초조함이 지배적인 감정상태가 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멈추게 하는 다름,차이와 철저히 차단하려 한다.
만남의 관점에서 볼때 성장이란 내적 성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확장을 의미하게 된다. --- 관계의 확장이란 결국 남이 너가 되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러한 연속성은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속과 존속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멘붕이란 이처럼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통로와 해법이 막혀버린 총체적 붕괴 상태를 말한다. 멘붕은 개인의 심리가 붕괴던 것을 일컫지만 실제로 붕괴된 것은 사회 전체다. ---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시스템의 붕괴가 멘탈의 붕괴로 이야기되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자아 혹은 개인의 멘탈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타인의 안녕을 돌아볼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나 돌보고 살아야지 주제넘게 다른 사람의 안녕에 신경을 쓰다가느 ㄴ자신도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다. 이에 따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힐링이 지닌 진정한 문제는 출발도 나고 도착점도 나라는 점이다. 문제의 근원도 나고 해결점도 나다. 회피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나다. 여기에서 고통의 사회성을 발견할 틈이 없다.
경청을 통해 ㅇ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이다. 나와 너는 타자성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공통의 운명이 된다. --- 이렇게 공통의 것을 공유했을 때 타자는 비로소 남에서 너로 바뀌며, 타자와 나의 만남은 서로 공유하는 그 무엇이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무의미를 공유하며 우리 인간 삶에 공통된 운명에 대해 서로 자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한 배움과 결속이 어디 있겠는가. 경청이란 이처럼 타자의 타자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동시에 그를 통해 나의 타자성에 문을 여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이렌들이여,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고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가? 선원들을 향해 날아오르자. 선원들의 어깨에 앉아 오디세우스가 그들의 귀에 틀어막아놓은 밀랍을 빼내자.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노래 부르자. 그리하여 저 배를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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